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주만 공습 (문단 편집) ==== 일본군 측 인물 ====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 공격과 연이은 남방작전에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한 공을 세웠지만, 야마모토와 달리 일본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6개월여 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면서 나구모는 항공모함 부대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역]]에 참가했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상처뿐인 승리[* 함정 피해는 미군이 컸지만 항공력의 피해는 일본군이 더욱 컸고, 이후 일본 항공모함 부대는 [[필리핀 해 해전]]때까지 재건에만 매달려야 했다.]를 거둔 끝에 결국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수상함대 사령관직을 이어가다가 [[사이판 전투]]에서 자살했다. * 이 이면에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의 불편한 관계가 있었다. 애초부터 나구모는 전함을 중시하는 함대파의 핵심 인물중 하나였던 터라 조약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야마모토와는 이전부터 대립하던 사이였다.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연공서열 때문에 앉게 된 것[* 연공서열만 아니었으면 나구모보다 먼저 항공모함 기동부대에 앉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레이테 만 해전]]에서 [[윌리엄 홀시]] 제독을 항공모함 [[즈이카쿠]]로 낚은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이다.]이어서 나구모 스스로도 이 자리를 불편해했고, 나구모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야마모토 역시 이런 상황을 그리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당시 일본 해군내에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진주만 공습을 전후로 더욱 심해졌다. 진주만 공습을 강하게 반대했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나구모였으며, 이후 진주만에서 3차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온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진주만 공습/전개#s-5.1|진주만 공습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야마모토의 불만이 반영되면서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공은 격하되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바로 해임해버리고 싶었지만 승리한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는 커다란 후폭풍이 닥칠게 뻔했고, 이후 남방작전의 공이 더해지자 나구모를 끌어내릴 명분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속사정 때문에 연합함대 내에서 나구모의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으며, 남방작전 이후의 전략적 행보에 대해 육군에서 주장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지지했다가 연합함대 내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나구모가 항공전 분야에 무지했던게 역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으로 이어지자 야마모토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선에서 만족하던 터였지만...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와 진주만 공격을 공중에서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후치다 미쓰오 중좌[* 아카기의 비행대장. 항공모함에서 지휘하는 비행단장은 중좌, 직접 비행하며 지휘하는 비행대장은 소좌이다. 후치다는 소좌 계급으로 항모 아카기의 비행대장이였다. 그러나 기존의 함장/비행단장이 비행대를 지휘하던 방식 대신, 공중에서 항모 4척의 비행대 전체를 통합지휘할 필요성 때문에 후치다가 실질적으로 비행대를 총 지휘하였고, 공습 직전에는 중좌로 승진하였다.]는 모두 전후까지 살아남았다. 둘은 해군병학교 동기였고 매우 친한 친구로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이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둘 다 진주만 공습 직전인 10월 15일자로 중좌로 승진하였다. 이들은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가 아카기가 격침될 때도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두 사람 모두 대좌까지 진급했고, 겐다는 [[항공자위대]]의 막료장(참모총장)까지 지냈고 후에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일본 참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록히드 사건]] 당시 수뢰혐의로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후치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 때까지 지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보도를 하는 한편 귀환한 부상병들에게 연금생활을 강요했으며 이에 후치다는 전쟁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패전 후 진주한 미군 조종사에 의해 [[기독교]]를 접하고, [[선교사]]가 되어서 [[간증]]하러 1970년대 [[한국]]도 방문하여 [[일제강점기|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회고록을 펴내면서 태평양 해전사 연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한 <진주만 공격 총대장의 회심>이라는 회고록을 내어 진주만 공습의 준비와 전투 과정을 잘 증언해 놓았다.[* 후치다는 회고록 초안에 '전 진주만 공중 공격대 총지휘관, 현 기독교 평신도 전도사'라고 직함을 썼는데, 출판사 측에서 '공중'이라는 단어를 빼놓아 "진주만 공격 총대장은 나구모 주이치인데? 얘는 누구?"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출판사 측의 네이밍 마케팅? 책에는 다른 중요한 순간에는 하느님이 직접 자신에게 나아갈 바를 귀뜀해주어 난관을 해쳐나갔다고 했는데, 유독 진주만 공습에만은 이러한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연합함대 참모장 쿠로지마 카메오 대좌는 소장으로 전쟁을 마쳤고 전후 기업가로 변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